한 시

한시의 그늘에 서서/겨울밤을 채질하는 시

방울꽃 2005. 12. 1. 12:19
雪逼窓虛燭滅明 눈 내리는 빈 창에 촛불 가물거리는데
月篩松影動西榮 달은 솔 그림자를 채질하여 서쪽 처마에 일렁이네.
夜深知得山風過 밤 깊어서야 알겠거니 산바람 지나는 줄을,
墻外蕭騷竹有聲 담 넘어로 댓잎 사운거리는 소리…!
-이우(李 ), <羽溪東軒韻 우게 동헌에서>

(음: 설핍창허촉멸명 월사송영동서영 야심지득산풍과 장외소소죽유성)


그대여 한시 속의 정감은 주로 느리고 고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느리고 고요한 미감을 깊이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 마음이 흘러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어 삶과 시간을 좀 더 느리고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약을 달이듯…, 마음을 달이고 시를 달여 깊이 우러나는 맛을 느낄 수 있어야 시의 정감이 제대로 우러나올 것입니다. 고요와 느림의 미학은 고요와 느림의 마음으로 맛보는 것이 제격이니까요.

강원도 우계라는 고을에 겨울 밤은 깊어 빈 창에 눈이 치고, 촛불은 밝았다 어두웠다 가물거립니다. 그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달빛은 소나무 그림자를 채질하여, 하얀 솔그림자가 서쪽 처마에 일렁입니다. 소나무의 가닥가닥 사이로 비친 달빛을 이처럼 채질하다고 하였으니, 달의 손결로 그 그림자가 더 맑고 밝게 걸러졌을 듯 합니다. 방 안의 가물거리는 촛불의 불빛과 밖의 달빛으로 걸러진 솔 그림자가 시선을 타고 빛의 다리로 마음의 안팎을 건너올 때, 문득 산바람이 지나감을 알겠습니다. 담 넘어로 깊이 들려오는 소슬한 댓잎 소리로 하여….

마음도 사물도 고요해져서야, 소리가 더 잘 들립니다. 밤 깊어서야 냇물 소리가 더 맑게 들리고 댓잎의 소리가 투명하게 가슴에 닿습니다. 어두워져야, 작고 그윽한 빛이 밤의 질감과 함께 또렷이 보이고 마음에 스며듭니다. 밤의 빛은 여리고 작지만 은은히 가슴에 스며드는 빛이요, 밤의 소리는 고요함을 비집고 영혼에 고이는 소리일 것입니다. 이 시에 담긴 소리와 빛은 은은한 겨울 밤의 표정이자, 또한 시인의 가슴속에서 빚어진 마음의 무늬일 것입니다. 사물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느림의 마음'과 깊이 들을 수 있는 '고요의 마음'이 있었기에 시로 채질한 마음의 정갈한 무늬!

그대여 달빛이 솔 그림자를 채질하듯, 겨울밤을 수놓은 이 아름다운 절창은 겨울밤의 맑은 무늬를 우리 마음 위에 채질합니다. 시인의 마음속에 담겼던 어느 겨울밤의 고운 무늬가 시의 채로 하여 다시 우리의 마음으로 거는 오늘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