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

공부방 이야기

방울꽃 2006. 1. 11. 11:06
 

부스스한 모습으로 가벼이 아침을 먹고, 방학이 되었지만 여유있게 되어지지 않는구나. 다 나가고 설거지 할 시간도 없이 벌건 모습으로 조카들이 들어온다.

정돈 덜 된 방이지만 상을 펴고 앉아서 언 몸을 녹이면서,

한 시간여 공부를 하고 나면 주섬주섬 정리하고서, 오늘은 컴 작업할 일이 기다리고 있네,

어찌 저찌 하고보니 벌써 시간이 이른 점심 챙겨 먹고 오늘은 뛰어야 하나보다.

아이들과 마주하고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볼을 감싸는 겨울 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에고 배고파라...추위와 허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아이들이 들어오고 있구나.

그렇게 또 상에 마주앉아 한 시간여 보내고 아이들이 가고 나니 연이은 시간의 쫒김인지 갈증으로 목이 탄다. 설거지 하고 내일 식사 대충 준비하노라면, 딸래미 오늘은 재밌는 드라마 있으니 먼저 봐달라고 소리친다. 참다가 한마디 “야 지지배야 니가 엄마 시간에 맞춰줘야지...” 그렇지만 조르고 있으니 오늘은 딸애 먼저 봐주고 씻고 들어오니 오늘 일이 끝났구나. 편안히 엎드려서 책도 좀 보고 해야 할 것 정리도 하고 그러다 오늘은 일찌감치 자자....

내 겨울 공부방 이야기와 생활이다.


나의 공부방 이야기는 애들이 유치원 다릴 무렵 남편은 내일부터 애들 몇 명이 올 거라고 공부 좀 봐달라고 한다. 

아는 이가 졸라서 나와 상의도 없이 결정했단다.

황당하고 화가 나고 그렇지만 못하겠다고 연락 할 수도 없잖은가? 

화만 낼 수도 없이 당장 닥칠 애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오랫동안 덮어 두었던 빛바래 버린 책을 꺼내 아이들이 없는 사이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아 시간 속에 빠지게 된다.

그 날 이후로 아이 기르느라 정신없었던 일상의 나른함이 번쩍 뜨이는 새로움으로

묻혀버린 나를 찾는다.

하루하루가 신선하고 즐겁고 좋아진다.

그 이후로 수업 끝나 들렀다 가게 된 조카와 방학이면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조카들이 있어 아이들과 접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수년간 밤잠을 쫒아 가면서,

육신의 아픔을 견뎌가면서,

온갖 외부의 유혹을 모질게 견디면서,

조금씩 쌓아두었던 지식들을 내내 안으로만 가두고 있었으니 아쉽기도 한데,

지금에서야 어느 누구에게 혼자만의 것들을 눈꼽만큼 전할 수 있으니

그 즐거움이 내게는 크기만 하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어가니 일할 곳이 생기더라,

정보화 교육 사업으로 컴맹탈출 교육이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사업에 내가 나서게 되었다.

짬짬이 배운 컴을 나이드신 분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에 설레임과 약간의 두려움이지만 용기내어 나서본다.

아가씨들 틈에 유독 나이든 내가 그들과 일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오히려 나이 들었다는 것이  어른들에게는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종강하는 날 경찰공무원 퇴직했다는 분은 모임 업무를 보고 있는데 서류작성을 할 수 있다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식사비 전하고 가시고, 수업 마지막 날에는 자녀들과 메일 주고 받는 방법을 공부하고 화면 가득히 수백송이 장미를 보내드렸더니 소녀처럼 좋아하시면서 목회하시는 남편을 일부러 오시라했다면서 냉면을 사 주셔서 감사히 먹었던 기억....

시장, 길가다 나이드신 분, 새침떼기 같은 어린 엄마도 먼저 알아봐 주시니 내가 더 감사하다.


애들이 방학이면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내 아이들 학년의 가까이 지내는 아이들까지 모아 공부방을 하려 하니 서너명 너댓명 두 그룹이 되었다.

서로 친한 사이라 공부 끝나면 나가 축구도 하고 아님 방에 들어가 모여 놀다가기도 하고, 아이들과 같이 그들의 생각들을 주고 받는 게 큰 즐거움인데 주말이면 내려오라는 말에 가보면 수고한다고 교외로 데리고 가서 요강 뒤집는 다는 풍천장어와 복분자에,

또 누구는 고소하고 쫀득거리는 고기에 알싸한 쐬주를,

그리고 또 누구는 바구니가  넘치게 꽃으로 정을 담아 보낸다.

 

낯선 곳에 이사왔지만 방학이면 아들의 성화에 몇 명씩 이어진다.

어떤 날은 접시 가득히 부침개를 보내는 덕분에 입이 터지게 먹고 공부를 시작하기도 하고,

아들은 시시때때로 친구엄마들이 음식을  먹여 보내고,

옷까지 사서 입혀 보내니 내가 그들에게 배푸는 게 아니라 내가 넉넉히 받고 있구나.

이렇게 몇 년의 세월에 묻혀 지나버린 시간들을 아쉬워하지 않게 스스로 위로하면서

내 즐거움에 빠진다.

 

사춘기 맞아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앉아 수줍게 앉아서 하고 있는 아이 친구 녀석들 

처음이라 얌전떠는 것 같은데...

요 녀석들 며칠 지나면 본색이 들어나겠지?

추운 겨울 저녁인데 공부한다고 오니 참 기특하다.

 

이렇게 하는 겨울 공부방이 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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