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

한시의 그늘에 서서/뱃속에 든 시

방울꽃 2005. 12. 1. 12:10
黃花笑我解官遲 벼슬 떼인 게 늦었다고 국화는 비웃을 테지,
酒熟花前可一  술 익었으니 꽃 앞에서 한 잔쯤 들이킴직도 하여라.
榮辱不關身外事 영화와 치욕일랑 이 몸 밖의 일이니,
鬼神難奪腹中詩 내 뱃속에 든 시야 귀신도 뺏기 어려우리.
-홍세태(洪世泰), <罷官 벼슬을 그만두고>


그대여 여기 홍세태는 뛰어난 시재를 갖추었지만,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마음껏 뜻을 펴지 못하고, 말단 하직을 전전하며 가난과 불행을 벗하여 애면글면한 평생을 고단하게 산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들을 보고 있으면, 시로써 한 시대를 들어올리는 웅장한 소리가 들립니다. 일반 사대부들이 중국시인을 배우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과 달리, 그는 내 안의 천기(天機)를 찾아, 진솔한 삶의 감정을 읊고 때묻지 않은 소탈함으로 인간적인 마음의 결들을 따뜻하게 풀어냅니다.

마음이 먹구름 속에 있으면 온 세상이 먹구름 속에 머물 테지만, 세상사와 인생살이가 먹구름 속에 있었어도, 그의 마음은 결코 그 먹구름 속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불행 속에서도 꽃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그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마음은 술잔 속에 비치어 삶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술의 표정과 함께 일렁였을 듯 합니다. 그의 말하지 않은 결 속엔 술잔 속처럼 서러운 시간이… 혼자서 눈을 껌벅이는 듯 하지만, 그는 단지 마음의 주머니를 뒤집어서 밝은 표정만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래서 애면글면한 삶의 슬픔을 뒤집은 그 마음 주머니엔, 벼슬 떼인 게 오히려 늦다고 조롱하는 누런 꽃도 사랑스럽기만 하고 그 앞의 술 한 잔도 달콤하기만 합니다. 마음 주머니를 삶 밖으로 뒤집어 꺼내놓은 사람이기에, 내겐 한 세상의 영화도 치욕도 없습니다. 그러하니 이 마음속에 맺힌 아름답고 깊은 시정(詩情)이야, 귀신도 뺏지 못할 것이니, 무엇이 부러우며 무엇이 한스럽겠는지요!

사람의 감정들은 때때로, 단어의 의미 밖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의 마음도 이 시의 드러난 말씨 속에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삶의 한 순간을 비벼 넣은 이 한 편의 시에는 그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고, 그 삶을 살아내는 그의 영혼의 한 살점이 들어있기에 이 시를 보면서 우리는 그의 삶의 체취와 영혼 속 살결을 은근히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삶의 먹구름과 귀신도 빼앗아 가지 못했던 바로 그 시! 그대여 시는 정녕 영혼이 영혼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인 까닭에, 귀신도 뺏지 못한 뱃속 그의 살가운 시들은 글자의 징검다리를 밟고서 우리의 뱃속으로도 가만히 건너올 듯 합니다. 정녕 우리 마음이 흐는히 한 편의 시의 가슴속에 미소처럼 머무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