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

한시의 그늘에 서서/아버지의 제삿날

방울꽃 2005. 12. 1. 12:11
百感中宵獨坐危 한밤중 온갖 정회에 홀로 무릎 꿇고 앉았느니
此心唯有鬼神知 이 마음 오직 영혼께서나 아실 테지.
掠簾風過燈微動 발을 스치는 바람에 등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却似當年侍疾時 도리어, 병중 아버지 모시던 그 때만 같아라.
-홍세태(洪世泰), <先忌日夜起獨坐愴感口占 아버지 제삿날 밤중에 홀로 앉아 슬픈 마음으로 짓다>


이 시는 아버지의 기일날 밤의 슬픈 감회를, 깊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등잔 불빛처럼 애잔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제삿날에 비친 쓸쓸한 감회! 이 시는 한시에 그리 흔하지 않는 '소재'로 빚어졌다는 점만으로도 흔치 않는 또렷한 시상을, 발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처럼 우리 마음의 그늘에 드리우는 듯 합니다. 아버지의 제삿날 밤의 슬픈 감정을 그렸지만, 육친의 애잔한 정과 함께 그의 애면글면한 삶의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져 있는 시!

그의 가슴은 어떤 시름으로 그리 살쪄있기에, 오직 죽은 영혼만이 이 마음을 알아주리라 말하였을까요. 가난이라는 그늘에서 일생을 보내었던 그였기에 고단한 삶을 뒤집어쓰고서 가족의 편안한 삶을 지켜주지 못했던 서러움이 그의 가슴 깊이 켜켜이 쌓였지는 아니 하였을지요…! 그리하여 등잔불에 고이는 밤의 시간은 더 깊고 무겁게 폐부 속으로 스며들고, 스산히 발을 흔들고 불빛을 흔들며 지나가는 무심한 바람은 그의 뼛속을 휘저으며, 그 옛날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던 시절으로 슬픈 마음을 불어갔을 것입니다.

이 한 편의 시를 더 깊이 읽기 위해선 또 다른 한 편의 시를 더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제삿날에 집이 가난하여 제수를 바칠 수가 없었는데 아내가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뽑아 팔았다. 이에 감격하여 시를 쓴다. (先忌日 家貧無以供祭需 室人拔頭上銀尖子 之 感而有作)>라는 긴 제목의 시입니다.

아버지 제삿날, 어쩌지 못하는 이 가난에
아낌없이, 은비녀 팔아 다른 이에게 건네었느니
당신의 효성스러운 뜻에 감격하고 보니,
이 내 삶이야 부질없이 장부의 몸이나 되었구려!
(祭先無力奈家貧 不惜銀尖賣與人 我自感君誠孝意 此生虛作丈夫身)

아마도 이 시는 같은 시기의 제삿날을 배경으로 씌어진 듯 한데, 그의 고단한 감정이 28자 시의 그릇 속에 남김없이 그대로 부어져 있는 듯 합니다. 깊은 가난의 그늘에서도 늘 곁에서 은비녀처럼 삶을 밝혀준 아내의 따뜻한 사랑! 이 한 편의 시를 위의 시에 얹어 놓고 보면, 시 속을 흐르는 감정의 물결은 거센 바람을 타고서 우리 마음의 기슭에 더 강하게 증폭됩니다.

'어느 슬픈 제삿날' 예전, 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말씨와 정회는 등잔불처럼 잔잔하고 담담하지만, 그 속엔 깊은 서러움과 슬픔이 강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 합니다. 애잔함 속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은은히 숨겨져 있는 까닭에…! 그의 시는 이처럼 삶의 잔잔한 여운들을 끌어와서, 진솔한 시상의 물레에 마음의 결들을 찬찬히 감아놓았습니다. 1600수에 달하는 그의 시가 남아 전하는 것은 상자 속에 넣어 두었던 그의 시고를 잘 간직해두었던 그의 아내의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대여 비록 가난한 삶 앞에서 애면글면 했으나, 가족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그네 삶의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보는 것은 분명 따뜻한 마음의 그늘이 될 것입니다. 저 깊이 드리우는, 등잔불에 고이는 밤의 시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