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

한시의 그늘에 서서/마음 항아리에 담은 달빛

방울꽃 2005. 12. 1. 12:13
山僧貪月色    산승이 저 달빛에 욕심이 생겨
幷汲一甁中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到寺方應覺    절에 도착하면 그때서야 응당 깨달으리니,
甁傾月亦空    병이 기울자 달 또한 비는 것을.
-이규보(李奎報), <詠井中月 우물 속 달>


찰랑이는 선미(禪味)의 물결이 달빛과 물빛 양 사이에 재미있게 스며 있는 절묘한 시! 그 선미의 물결에는, 물긷는 순박한 산승이 살고, 그 산승이 좋아하는 달빛이 살고, 그 산승과 달빛을 시에 비벼 넣고서 혼자 웃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삽니다. '달빛을 긷는다'는 매우 운치 있는 시적 표현과 함께, 간결하면서도 절묘한 비유(알레고리)로 엮어진 이 시는, '마음'의 속성을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항아리 속의 물결은 마음일 것이고 그 물결에 고인 달빛은 마음에 담기는 것일 것입니다. '마음/마음에 담기는 것…!' 마음은 본래 비어있는 것이어서 이를 공(空)이라 하고 그 공에 담기는 것을 색(色)이라 할 때, 마음 거울은 본래 빈 것이라 만상을 비추고도 그 상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 마음에 잠시 비추었다 지나가는 하나의 상(象)일 테니까요.

씨앗도 겉과 속이 있고 작은 나뭇잎도 앞면과 뒷면이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음과 양이 그렇고, 삶과 죽음이 그렇고, 색과 공이 그렇고, 너와 내가 그렇고 들숨과 날숨이 그렇고, 일(一)과 다(多)가 그렇습니다. 역설의 연기(緣起)로 이루어진 이것은 하나도 아니면서 둘도 아니어서, 둘이면서 늘 하나인 채로 살아갑니다. 역설의 연기로 굴러가는 영혼의 원! 그 속에 우주와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비추는 것과 비치는 것…, '마음/우주(만물)'은 그렇게 늘 하나로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산승이 긷는 물과 달빛 속에는 '마음의 소멸과 신생'의 순환이 있고, 그 순환 속에서 우리의 삶은 늘 새롭고 싱싱할 것입니다.

강물이 아무리 흘러도
산그늘은 떠내려가지 않고,
호수 위에 밤새 앉아있어도
달은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체가 없어서
모든 것을 다 담지만
그 무엇에도 떠내려가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갈 곳도 없고 올 곳도 없으며
빠질 곳도 빠지지 않을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찾아가는 명상록 14장)

비록 물을 붓고 나면 다 없어질 달빛이지만, 체 없는 무량의 마음에 그 달빛을 길어 삶의 항아리에 부어보고 싶어집니다. 그 맑은 달빛이 고요히 고여 있는 동안, 우리 마음 거울은 그 만큼 하얗게 하얗게 보드랍고 촉촉한 물결로 한없이 일렁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