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교실(최원현 강의)

제10강]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 무엇을 쓸 것인가 ②

방울꽃 2006. 8. 23. 22:20
제10강]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 무엇을 쓸 것인가 ②


6. 무엇을 쓸 것인가 ②


무엇을 써야 할까?

이 시간에는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수필을 썼을까, 과연 무엇을 나타내려 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썼는가를 한 번 예를 들어봅니다. 자료는 최원현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을 중심으로 한 [나의 수필론] - 내 그리움의 구체화, 형상화입니다.


[나의 수필론] - 내 그리움의 구체화, 형상화
- 최원현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을 중심으로 -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특히 우리 삶의 이야기를 사건화 시키고, 위기감을 부여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들이 산문문학이다.

그중 수필은 1인칭 문학으로써 허구가 아닌 실제 체험한 자기만의 이야기요, 설혹 직접적인 자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의미화 되다보면 나로 귀결되어 독자는 결국 나를 통해서만 나와 동화되고, 감동하고, 공감하게 된다.

내 수필의 주제는 그리움이다. 그리고 이 그리움은 두 개의 갈래로 분류된다. 하나는 구체화되지 못한 채 강물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는 이미지만의 그리움이고, 하나는 어린 날의 추억에서 발아(發芽)하여 현재라는 텃밭에서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정착된 공간을 확보한 상당히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그리움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相思花)처럼 현실화 될 수는 없으되 그렇다고 떨쳐버릴 수 없이 사고(思考)의 영역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이고, 후자는 현실 속에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구체적(사실적) 형상화도 내게 큰 이미지로 존재하면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형태의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독자에게도 형질은 나와 같으되 형상은 독자의 것으로 새롭게 구현되어 읽는 이의 몫이 되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려는 것이 내 수필적 의도이기도 하다.

어차피 삶이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고 반추되며 또 그 삶의 맛이나 향기도 독자나 작자의 개인차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삶이라도 렌즈의 초점을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맺히는 사상(事象)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한 곳에서의 체험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받는 느낌은 꼭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수필도 형상화(形象化)하고, 의미화(意味化)하고, 사실화(事實化)된 그리움의 실체들이 독자와 만났을 때 개인차 내지 환경에 따라 감동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필은 분명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1인칭 문학이다.

그러나 그 출발로부터 도착까지 사이에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나-독자-를 새롭게 포섭하고, 확충 하면서 함께 절대 공감하는 문학이 수필이기도 하다.

수필을 본격적으로 써온 지 20여년,. 그 동안 수필집도 내었고 작품도 꽤 많이 썼다. 그러나 아직도 '수필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하고 얼마큼이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쩌랴. 내 재주 없음인가, 아니면 워낙 수필이 그렇게 쓰기 어려운 장르의 문학이어서 인가 쉽게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수필을 수많은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 만남의 상황과 감동들이 '나'라는 대롱(관)을 통과하여 나오는 동안 형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맛깔스러움과 멋스러움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수필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글이 아니라 깨닫게 하는 글이다. 그래서 읽는 이가 맛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속으로 스며들며 가슴속에 물줄기를 내는 글, 그런 글이 수필이다.

나의 수필은 한 겨울의 꽁꽁 언 땅 밑 속으로 깊이깊이 흐르는 따스한 물줄기가 되고 싶다.

화려하기보다는 단정함을, 강하지 않으면서도 약하지는 않은,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들꽃 같은 모습에 나름의 향기를 가득 품은, 그래서 못 견디게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어쩌다 한 번씩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그런 수필이고 싶다.

사실 수필이란 거울을 보며 그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나'와 '나'의 만남일 수 있다. 허나 그 거울 속의 모습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조금은 색다른 만남이랄 수 있겠다.

자기의 생활이나 사상과 감정들을 글 솜씨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수필이라면 그 사람의 생활이나 사상이나 감정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남겨야 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작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아닐까.

재미없고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 신변잡기 같은 생활이야기를 이 바쁜 세상에 누가 무엇 하러 읽어줄 것인가. 최소한 읽는 이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읽은 이가 어느 정도의 맛과 멋은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구성과 표현을 치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평범 속에서 비법을 드러내는 글이 수필이라지 않는가.

가능한 한 어렵고 전문적인 표현보다는 쉽고 아름답고 친근감이 있는 순수한 우리말 표현을 애용하고, 강한 주장이나 제시보다는 내 생각을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펼쳐내어 읽는 이가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한 편의 글 속에서 작가 의 생각에 동화(同化)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세일 것 같다.


아이가 현관에 꽂아둔 마른 억새꽃 다발을 본다.
바람을 다스리기보다 다스림 당하며 살다 어느 날 아이의 손에 의해 내 집으로 옮겨진 억새꽃 다발처럼 무언가 사람도 생명이 떠난 후에라도 살았던 흔적은 남겨야 할 것 아니냐는 자기 각성이 하나의 숙제가 되어 가슴 한 쪽을 차지한다. 땀이 베인 저마다의 삶의 향기, 그게 나이 값이 아닐까. 수필 <나이 값> 중에서

수필 <나이 값>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장보다는 나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이끌어내 놓고 결론은 내가 아닌 읽는 이가 내리는 것처럼 하되 내 생각 쪽으로 슬쩍 유도함으로 거부감을 없애려 해 본 것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색에서 나오는 글이다. 그래서 사상과 철학,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우러져 읽는 이의 가슴속에 새로운 감동으로 와 닿을 때 그의 삶은 한여름 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등산길 돌샘에서 물 한 그릇을 들이켰을 때의 신선함과 상쾌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가슴을 때리며 울리는, 그리고 때로는 저 가슴 밑바닥까지를 시원케 해주는 생명의 감동이나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감동이 클 때 독자는 그걸 잊지 못하며 그것이 곧 문학성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수필의 문학성은 작가의 체험 곧 눈물, 고뇌, 슬픔, 아픔, 고통, 기쁨, 절망들이 작가에 의해서 인생의 통찰 내지 달관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으로써 잘 익은 포도주와 같이 읽는 이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지고, 감동되고, 동화될 때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 아니라 모든 문학이 다 그렇겠지만 수필은 특히 독자와 공유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나 논리적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의 체험과 지식, 나와 반대되는 사상이나 의견까지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엔 문장력이라는 기술적 수단이 우선되어야 하겠고 그것은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찮은 자기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작품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특별한 글감이 되도록 기술적(뛰어난 문장력)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隨筆은 곧 作家'란 말을 쓴다. 수필가는 참다운 인격체가 되지 못하면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는 말인데 수필은 머리로 쓰는 글이 아니고 마음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얘기하되 자기의 인격, 품격, 지식, 연륜 등에 의해 재 조형(再造形)된 새 모습 그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느낌과 의미를 형상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수필의 생명인 체험과 진실이 읽는 이에게도 절대적으로 공감될 수 있을 때 '작가와 독자의 수필 속 여행' 곧 둘이서 함께 하는 체험여행이 공감의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수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를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수필은 전환을 많이 한다. 때로는 사건을 역순으로 도치시켜 전개해 가기도 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급작스런 전환을 시도하되 그 전환이 혼란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신선함을 줄 수 있게 한다. 물론 혼란의 우려도 없진 않겠지만 의미 있는 변화, 작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그런 극적 전환이 독자에게 전달될 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1) 새끼손가락 손톱 위에 백반 섞은 꽃잎을 얹으니 시릿한 감촉이 아릿아릿 전 해 오고 꽃내음이 더욱 짙다.
(2) 비닐 끈으로 돌돌 싸고 실로 칭칭 감는데 아이가 켠 라디오에서 가야금 산조 가 흘러나온다.
(3) 문득 원나라에 붙들려가 가야금을 타던 궁녀 생각이 떠오르며 어린 날의 향수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수필 <발뒤꿈치> 중에서

현실과 과거, 과거와 현실이 교류되면서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이미지를 주고자 한 시도이다.
독자를 끌어들일 수 없는 글은 아무리 잘 된 글이라고 자신이 평가해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결코 좋은 글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쓰는 것이 '붓 가는 대로'인 것처럼 읽히는 것은 물 흐르듯이 되어야 하는 것이 수필이기에 문장의 원숙이 선행되어야 하고, 자신의 삶과 인생이면서도 일상성이 아닌 전문성으로 사건마다 독자적 구성력을 확보함으로써 표현상 전환을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쉬운 글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쉽다는 것이 아무나 아무렇게나 쓰는 글도 수필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필의 매력 중 가장 큰 매력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접근하여 시나 소설이나 희곡의 장르를 벗어나면 수필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수필이라면 어떻게들 받아들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사실 그대로 문장화해 놓아야 한다는 진솔성을 사람들은 너무 무시하고 사는 것 같다.
또 하나 읽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생각한 대로 이해하면 되는 글이라는 점에서 수필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가야 할 이유가 없이 내 식으로 읽고 내 식으로 이해하면서 내 수준에서 감동하고 만족해 할 수도 있는 글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이 독자에게 주는 목적성, 이를테면 수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수필은 인간의 심성 깊이 스며드는 글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할까라는 데도 의견이 모아질 수 있으리라.
나의 이야기이지만 내 이야기만이 아닌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요, 나 외에는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체험의 글감을 재미와 호기심과 감동이 어우러진 내용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도 수필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1) 삶이란 막히면 돌아가야 하고 아니면 넘어야 하는 것, 그리우면 그 그리운 곳으로 찾아 가면 된다지만 갈 수도 없고, 가 봐야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은 어디 가서 채운단 말인가.
(2) 밖으로 나와 파랗고 맑은 하늘을 향해 어머니! 하고 가만히 불러본다.
(3) 어머니가 하늘빛 웃음을 띄고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만 같다.
(4) 제법 선명한 얼굴 모습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에 유난히 정이 가득한 것 같다.
(5)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어쩜 어머니도 이런 맑은 하늘빛을 참 좋아 하셨을 것만 같다.
(6) 어머니는 이젠 맑은 하늘빛으로 내 곁에 있으시려나 보다.
       - 수필 <어머니의 눈> 중에서-

마치 물이 어름이 되고, 어름이 녹아 수증기가 되고, 그것이 식어 다시 물이 되는 것처럼 수필가는 'H2O'라는 사실적 근거 곧 체험을 상황과 필요에 따라 어름으로, 수증기로, 물로 형상화시키는 사람이다.

지금의 삶과 어머니, 어머니와 하늘, 그리고 그리움 그것들은 담을 수 없는 무형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수필가는 그것을 담는 방법을 안다.
바로 작가의 가슴에 담아 독자의 가슴에 담아 줌으로써 동질의 체험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어쩔 수 없는 자기의 이야기 내지는 자기로 연결되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사랑하거나 미워해야 가능한 것이요, 좋은 수필을 쓰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일 때 좋은 작품은 태어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는 좋은 수필도 씌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이 곧 작가'인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