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

난초 그림에 제하다(이방응)

방울꽃 2009. 2. 8. 15:27

  다음 작품은 중국 청나라의 화가 이방응이 자신이 그린 그림에 써넣은 題畵詩입니다.

동양화의 경우 화폭의 여백에 그림과 관계된 내용을 담은 절구, 또는 율시를 첨록하는데, 그러한 시를 일컬어 제화시(題畵詩)라고 하며 화제시(畵題詩)라고도 합니다.

 

    또는 구분하여 그림을 보고 그것에 연상하여 지은 시를 제화시, 그림의 동기가 되었던 시를 화제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림을 시적 제재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제화시는 그림의 종류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너무나 절묘하여 함께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題畵蘭 -李方膺-

 

題畵何必太矜奇

그림을 그리는데 굳이 자만하고 기이할 필요가 있을까

信手拈來自得宜

손 가는대로 집어다 놓으니 스스로 당당함을 얻는다네

葉亂花迷渾是墨

잎은 무성하고 꽃은 눈부시나 모두가 먹으로 되어있고

芳心點出釋人疑

꽃에 스며있는 아름다운 마음은 도통한 스님과 흡사하네

2. 감상

   첫째 구절의 太矝竒는 난초를 그리는데 있어서 뭐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느냐? 라고 반문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지만 사실은 대단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은 기이하고 엄숙하며, 교만한 모습으로 난초를 그리지만 자신은 그처럼 특별하게 그리지 않아도 좋은 난을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는 자긍심과 어쭙잖은 화가들의 그림 솜씨를 꾸짖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고 있으니 다음 구절이 얼마나 절묘할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감은 둘째 구절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빛을 발합니다. 불교의 유명한 구절을 가져와서 자신의 난 그림이 아주 당당하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수념래는 아주 유명한 불교의 말입니다. 염화시중(拈華示衆)ㆍ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도 하는 불교의 유명한 고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고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신수염래는 부처께서 손 가는대로 꽃을 집어서 들어 보였다는 것에서 온 것으로 이 꽃 속에는 엄청난 불교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용사(用事)를 사용하여 자신이 그리는 난초 그림을 설명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자만심이겠습니까? 손 가는대로 가져다 놓아도, 즉 손 가는대로 붓을 놀려 그림을 그려도 그 그림이 스스로 당당함을 얻는다고 했으니 자신이 그리는 그림은 석가모니가 대중에게 보여준 꽃만큼이나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제 셋째 구절에서는 앞의 시상을 한 번 굴리면서 더욱 절묘한 노래를 만들어냅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亂과 迷인데, 이것이 墨과 연결되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亂은 평범하게 풀이하면 어지럽다 정도가 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글자는 어지럽다와 다스린다, 가지런하다 는 뜻을 가져서 서로 반대되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는 글자입니다. 이기서는 난초의 잎이 무성하지만 어지럽지 않고 가지런하게 잘 정리된 모습을 표현한 것이 됩니다. 迷는 일반적으로는 혼미하다. 흐릿하다 정도의 뜻을 가지지만 여기서는 미안(迷眼)으로 되어서 눈을 어지럽히다. 눈을 어지럽힐 정도로 눈부시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잎은 무성하여도 질서정연하고, 꽃은 아름다워서 눈이 부실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눈을 부시게 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지만 이것이 모두 먹으로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墨과 연결하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작가의 자만이 극치에 달하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 하나로 그린 것이 이처럼 오묘하니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대단한 기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솜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개로도 작가는 성이 차지 않았으니 마지막 구절에서 한 번 더 자신을 뽐내게 됩니다.

 

   마지막의 네 번째 구절은 더욱 절묘합니다. 삼점오출의 수법으로 그린 꽃받침과 꽃잎(난꽃-매화나 난초 그림에서 꽃과 꽃받침은 매우 중요합니다)은 너무나 고매하고 아름다운데다가 석가모니가 대중 혹은 가섭에게 보여준 꽃처럼 진리를 담고 있어서 마치 도를 통한 스님과 같은 모습이라고 한 것입니다. 방심(芳心)은 바로 석가모니가 손으로 들어서 대중에게 보여준 꽃 속에 담겨 있었던 우주의 진리를 나타낸 것이면서 그 꽃 속에 들어가 있는 작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난초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 이방응은 꽃을 든 남자인 석가모니와 동격이 됩니다. 무례하지만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지요. 이 부분을 보면 사람들이 왜 그에게 괴(怪)라는 호칭을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가 들어 있는 그림을 보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 그림은 잎이 적당히 많은 가운데 꽃이 한 송이가 피어있는 상태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뒤의 석인의(釋人疑)에서 더욱 절묘함을 얻습니다. 석인은 석씨 등으로 쓰는 말인데, 승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釋이 석가모니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승려의 법명 앞에 이 글자를 붙여서 쓰게 되면서 굳어진 표현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글자는 역시 疑입니다. 疑는 의심스럽다. 비슷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글자인데, 여기서는 도를 통한 승려, 즉 부처인지 의심스럽다는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의심스럽다는 혼동을 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의미가 되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작가와 그림과 감상자의 삼각구도를 완성하면서 작가의 자신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부분입니다. 즉 난초 그림을 그리는 이방응은 꽃을 들어 보이는 석가모니와 같은 존재로 먹으로 그렸지만 눈을 어지럽힐 정도로 화려하고 의미가 깊은 꽃을 그렸고, 그가 그린 그림은 석가모니가 대중에게 보여준 연꽃과 같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작가의 자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으니 이처럼 훌륭한 그림을 보는 감상자들이여 너희들이 과연 석가모니가 행한 염화시중의 뜻을 알아본 가섭처럼 내 그림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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