郞如車下 님은 수레의 바퀴와 같고
妾似路中塵 저는 길 중에 먼지와 같지요.
相近仍相遠 서로 가까워 졌다 이내 멀어지니
看看不得親 보고 또 바라볼 뿐 친한 순 없네요.
-成侃, < 曲 님과 나 사이>
그대여, 한시에선 현대시만큼 그리 많은 비유들이 나오진 않지만 이 시처럼 짧은 비유로 엮어진 재미있는 시들도 있습니다. '님은 수레와 같고 나는 길 위에 먼지와 같다.' 2가지 비유가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풍경은 다름 아니라 수레바퀴가 남기고 간 슬픈 이별의 풍경입니다. 길이란 떠남과 새로운 만남의 구도를 내장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도의 포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수레나 그 수레의 바퀴일 뿐이고, 그 구도 속에 놓여서도 길 위의 먼지는 이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머무름과 잊혀짐의 구도를 안고 사는 것이 먼지의 운명일 것입니다.
이처럼 길 위, 수레바퀴와 먼지는 하나의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함께 할 수 없고, 단지 순간 속에서 하나의 접점을 이룰 뿐입니다. 이 시가 더없이 또렷한 인상으로 우리의 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 하나의 접점에 시선을 모아서 '만남과 이별'의 이미지, 너무 짧아서 아쉬움만 더하는 어느 여인의 애끓는 심정을 너무나 간명하고 절실하게 읊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비유란 다른 대상 속에 스며 있는 똑같은 속성을 '바라보고서[觀]', 그 서로 다른 것을 '하나의 의미 자장' 속으로 '꿰는[貫]' 것입니다. (어쩌면 '관(觀)과 관(貫)'은 다른 말이면서 같은 말이기도 한 연기의 관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비유의 바늘은 사물의 내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비유의 실은 그 내면의 속살들을 하나로 꿰어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비유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다리를 놓아주고 또 사물들의 새로운 내면과 만나게 해 줍니다.
이내 가까워져서 이내 멀어만 지는 님, 그 님은 어찌 저 '수레바퀴와 먼지'와 저토록이나 닮았을까요. 아득히 멀어지는 수레를 바라만 바야 하는 먼지의 신세는 어찌 나의 이 슬픈 운명과 이리도 비슷한 것인지요. 마치 '내 운명'을 그대로 사물에 옮겨 놓으면 저러한 것이 되지는 않을지…! 님을 그리워만 하고 다가갈 수 없는 여인의 마음과 처지가 실로 이 '수레바퀴와 먼지의 운명'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비유의 선명도가 너무나 진하고 또렷하여서 '바라보고 바라볼 뿐 친할 수 없다.'는 그 외침이 절실하게 피부로 다가옵니다. 동그란 물레처럼 여인을 마음을 감고서 저만치 멀어져 가는 수레바퀴. 고작 20자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숨결이지만, 비유의 물레 하나에 마음의 실을 고스란히 얹어놓은 시! 이 시는 그렇게 비유라는 물레가 어떻게 마음을 실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또렷이 보여주며, 언어의 물레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듯 합니다.
妾似路中塵 저는 길 중에 먼지와 같지요.
相近仍相遠 서로 가까워 졌다 이내 멀어지니
看看不得親 보고 또 바라볼 뿐 친한 순 없네요.
-成侃, < 曲 님과 나 사이>
그대여, 한시에선 현대시만큼 그리 많은 비유들이 나오진 않지만 이 시처럼 짧은 비유로 엮어진 재미있는 시들도 있습니다. '님은 수레와 같고 나는 길 위에 먼지와 같다.' 2가지 비유가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풍경은 다름 아니라 수레바퀴가 남기고 간 슬픈 이별의 풍경입니다. 길이란 떠남과 새로운 만남의 구도를 내장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도의 포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수레나 그 수레의 바퀴일 뿐이고, 그 구도 속에 놓여서도 길 위의 먼지는 이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머무름과 잊혀짐의 구도를 안고 사는 것이 먼지의 운명일 것입니다.
이처럼 길 위, 수레바퀴와 먼지는 하나의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함께 할 수 없고, 단지 순간 속에서 하나의 접점을 이룰 뿐입니다. 이 시가 더없이 또렷한 인상으로 우리의 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 하나의 접점에 시선을 모아서 '만남과 이별'의 이미지, 너무 짧아서 아쉬움만 더하는 어느 여인의 애끓는 심정을 너무나 간명하고 절실하게 읊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비유란 다른 대상 속에 스며 있는 똑같은 속성을 '바라보고서[觀]', 그 서로 다른 것을 '하나의 의미 자장' 속으로 '꿰는[貫]' 것입니다. (어쩌면 '관(觀)과 관(貫)'은 다른 말이면서 같은 말이기도 한 연기의 관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비유의 바늘은 사물의 내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비유의 실은 그 내면의 속살들을 하나로 꿰어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비유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다리를 놓아주고 또 사물들의 새로운 내면과 만나게 해 줍니다.
이내 가까워져서 이내 멀어만 지는 님, 그 님은 어찌 저 '수레바퀴와 먼지'와 저토록이나 닮았을까요. 아득히 멀어지는 수레를 바라만 바야 하는 먼지의 신세는 어찌 나의 이 슬픈 운명과 이리도 비슷한 것인지요. 마치 '내 운명'을 그대로 사물에 옮겨 놓으면 저러한 것이 되지는 않을지…! 님을 그리워만 하고 다가갈 수 없는 여인의 마음과 처지가 실로 이 '수레바퀴와 먼지의 운명'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비유의 선명도가 너무나 진하고 또렷하여서 '바라보고 바라볼 뿐 친할 수 없다.'는 그 외침이 절실하게 피부로 다가옵니다. 동그란 물레처럼 여인을 마음을 감고서 저만치 멀어져 가는 수레바퀴. 고작 20자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숨결이지만, 비유의 물레 하나에 마음의 실을 고스란히 얹어놓은 시! 이 시는 그렇게 비유라는 물레가 어떻게 마음을 실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또렷이 보여주며, 언어의 물레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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