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餘庭園簇 苔 비가 온 뒤 정원에 이끼는 잔뜩 끼었는데 人靜雙扉晝不開 인적은 고요하여 사립문은 낮에도 닫혔고나. 碧 落花深一寸 푸른 섬돌에 떨어진 꽃은 한 치나 되거니, 東風吹去又吹來 봄바람에 불러갔다가 또 불어오네라. -진화(陳 ), <春晩> 봄이 기우러 가는 어느 날 정원에 비가 내려 이끼들이 돋은 터가 더욱 싱그럽게 다가옵니다. 푸릇푸릇 돋아난 이끼들의 집인 정원엔 사람의 소리는 아니 들리고 짝으로 이루어진 사립문은 낮에도 닫혀있습니다. '낮에도 닫혀있다'라는 말엔 한적함과 고요한 운치가 담겨있지만, 이 닫혀있다는 말을 통해서 정원 안의 공간과 밖의 공간은 둘로 나뉘어지고, 이 나뉘어짐을 통해서 밖의 공간은 밀어내고서 순전히 안의 공간으로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원 안의 공간을 더 내밀(內密)의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그 공간 속에서 대상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만의 정적인 시간들은 더 살가워집니다. 그렇게 나만의 시선과 감정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바깥과 단절된 자신만의 공간이기에 정밀감의 무게는 살포시 더 깊어지는데, 꽃들은 떨어져서 푸른 섬돌에 한 치나 쌓였습니다. '섬돌에 떨어진 꽃이 한 치나 된다'는 과장된 표현을 통해서 가슴속 마음의 섬돌에 소복이 쌓인 감정적 폭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끼 낀 정원과 꽃 떨어진 섬돌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꽃은 실재적인 물리적 공간이지만 '落花深一寸'은 자신의 내면에 그려진 심리적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내면 공간과 실재적 공간이 자연스레 혼융(混融)됨으로써 이 시의 눈빛은 더욱 산뜻하게 살아나는 듯 합니다. 그렇게 고요함과 꽃잎이 한 치나 쌓여있는 이 섬돌 위로 봄바람은 불어 불어 꽃잎을 쓸어 갔다, 쓸어 왔다… 합니다. 한 치나 쌓여 있는 고요함의 정감을 살짝이 흔드는 동적이 이미지가 등장함으로써 고요하지만 또한 고요하기만 하지 않는 '생동감 있는 고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빗자루의 맘을 지닌 봄바람은 그렇게 섬세한 동적인 이미지를 통해 더욱 '생동감 있는 정적 이미지'를 그려냅니다. 글자란 정을 옮겨 붓는 표주박이 아니던가요. 정을 아무리 옮겨 부어도 넘치지 않으며, 또한 정을 전혀 옮기지 않아도 저만치서 스스로 자족한 글자들! 이미 수없이 많은 추억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끝없는 미래의 만남들을 내장하고 있는 그들! 이 시의 글자들이 간직한, 한 치나 쌓여 있는 꽃과 그 꽃잎을 이리 저리 흔드는 바람의 손결 속엔 시인의 정이 가득히 부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한 치'란 바로 그 부어진 정의 높이며, 그것을 흔드는 바람은 바로 그 정의 은은한 술렁임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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