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

한시의 그늘에 서서/봄의 옷고름을 푸는 비

방울꽃 2005. 12. 3. 11:52
好雨留人故不晴 단비가 날 머물게 하려고 개지 않나니
隔窓終日聽江聲 창 너머로 온종일 강물 소리 듣노라.
斑鳩又報春消息 산비둘기 또한 봄소식 전하려
山杏花邊款款鳴 산살구꽃 가에서 다정스레 울고야.
-신광한(申光漢), <阻雨宿神勒寺 비에 막혀 신륵사에서 묵다>

(음: 호우류인고불청 격창종일청강성 반구우보춘소식 산행화변관관명)

봄에 오는 단비도 적적한 산사를 찾아준 객이 좋았던지, 그를 보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개지를 않습니다. 비의 마음이 그렇게 손이 없어도 갈 길을 잡아두니, 어쩔 수 없이 산사에 들어앉아 종일을 불어난 강물 소리에 귀를 적시어 봅니다. 비오는 날의 산사에서 듣는 맑은 강물 소리, 그 소리는 안으로 시간을 머금고 자족할 줄 악기처럼, 내면의 그늘과 영혼 사이를 살풋이 흘러갔을 듯 합니다.

반가운 봄비가 부드러웠던 탓에, 산비둘기도 좋아서 맑게 지저귑니다. 산살구꽃 가이기에 산비둘기의 지저귀는 소리에는 산살구꽃의 빛깔과 향기가 함께 묻어 있을 것입니다. 봄비로 좀더 화사해졌을 산살구꽃과 그 꽃 빛을 널리 흩뿌리고 날아가는 새소리! 아마도 비가 그를 붙잡은 까닭은 산방(山房)에 앉아 듣는 강물 소리와 산비둘기가 전하는 봄소식과 산살구꽃의 비 젖은 눈빛을 보라고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산살구빛 봄, 그 슬거운 가슴의 옷고름을 푸는 살가운 비. 그 옷고름을 풀어 시인과 산을 봄의 가슴에 안기우게 하는 비. 저도 그 살가운 비가 되어 봄의 옷고름을 살며시 당겨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산비둘기는 더 목청껏 봄을 전할 것이요, 산살구꽃도 더 많이 촉촉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그대여 한시의 어느 숲 속을 거닐다 보면, 예전 봄의 옷고름을 풀어주던 살가운 그 비를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의 소리와 빛 그리고 우리 마음까지 넉넉히 끌어당길 줄 아는 그 촉촉하고 보드라운 손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