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교실(최원현 강의)

제17강] 좋은 수필 쓰기 (2) - 살릴 것만 살리기

방울꽃 2007. 11. 24. 21:35
제17강] 좋은 수필 쓰기 (2) - 살릴 것만 살리기



살릴 것만 살리기 -  버릴 것과 살릴 것의 결정



과일을 잘 고르는 사람

시장에 갔다가 과일을 사게 되었습니다. 과일이 수북히 쌓여있는 과일전에서 아내는 다른 것을
사겠다며 나더러 바구니에 과일을 골라 담으라고 했습니다.
참외와 사과 몇 개를 사는 것인데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큰 것을 고르는 게 잘 고르는 것일지, 잘 생긴 것을 골아야 잘 고르는 것일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일이 크고 잘 생겼다 해서 맛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과일을 고르는 첫째 조건은 맛있는 걸 고르는 것일 것입니다.

수필 쓰기도 과일 고르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일을 잘 고른다는 것은 과일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럽게 맵시 있게 잘 깎아낼 수도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수많은 사과 중에서 맛있는 사과를 골라내는 일은 단지 사과의 외형으로 선택하는 조건이 아닐 것입니다.
나무에 열린 사과, 햇볕을 받으며 익어가는 사과, 주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정성스레 가꾸어진 사과, 그 과정이 결과인 사과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사과를 잘 고르는 사람이란 그 일련의 과정을 사과를 통해 들여다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니 과일을 깎아내 와도 눈썰미 있게 맛있게 깎아내 올 것이고, 그런 안목이라면 사과를 잘 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필 쓰기가 사과 고르기와 같다는 것은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맛보다는 예쁜 모양만을 중시하거나, 무조건 큰 것만을 고르는 것은 좋은 사과 고르기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수필 쓰기에서도 단어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쓰임에 꼭 알맞는, 표현상으로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고, 꼭 필요한 말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선행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언어들의 조잡한 잔치상이 되어 아름다운 표현인 것 같은데 정작 무슨 말이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기로 합니다.
과일을 잘 고르는 사람은 과일이 맺히기 전의 꽃향기까지도 맡아낼 수 있는 투명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며, 투명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과일을 깎아야 먹고 싶을 만큼 모양도 나고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서 바로 좋은 과일 고르기와 같은 참신한 주제 찾기에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유식 교수의 <참신한 주제 찾기를 위한 10가지 착상법>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 참신한 주제 찾기를 위한 10가지 착상법

훌륭한 수필가가 되려면 일차적으로 풍부한 인생경험과 폭넓은 독서를 통해 다양한 교양체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런 바탕 위에 7가지의 자질이나 능력도 소유해야 할 것이다. 상상력. 연상력. 직감력. 분석력. 추리력. 창조력. 유머 감각. 위트 정신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런 바탕과 자질이 겸비되어 있어야 다음 10가지의 착상법을 능수능란하게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설(假說)에 입각한 착상

가령 석굴암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대불(大佛)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왜 대불은 가냘픈 심성질(心性質)이 아니고 비만형의 영양질(營養質)일까?
만약 대불이 심성질이라면? 이런 가설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당시의 유행적이고 전형적인 불상의 체형이 비만형이라면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둘째 그것을 조각한 석공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천민계급이던 석공이 빼빼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석공이 평소 자기도 비만형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면 그 욕망이 그 조각에 반영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가설을 통해 상상과 추리를 해 나가다 보면 거기에 걸맞는 참신한 주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유사(類似) 착상

자연계를 잘 살펴보면 그럴듯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자연계 이외에도 습관이나 사고방식이 다른 유럽의 예 또는 다른 소재에서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공작과 노고지리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어떤 특성을 유추해 낼 수도 있다.
공작은 깃털이 아름답지만 날 수도 없고, 노래도 할 줄 모르는 반면 노고지리는 깃털은 볼품이 없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멋진 노래를 한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도 신이 부여한 각자 나름의 능력의 한계와 그 장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문명의 한 현상을 맥루한이란 학자는 '인체 확장설'로 설명하면서 <눈-망원경. 다리-비행기. 귀- 음파탐지기> 등으로 화장되었다고 했는데, 이 이야기도 결국은 유추발상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하겠다.


3. 대비(對比) 착상

세계의 4대 성인들의 공통점을 비교법을 통해 찾아보아도 흥미로운 수필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고, 반대로 대조법을 통해서 찾아도 좋을 것이다. 또 아시아에서는 톱을 당기면서 나무를 자르는데 미국에서는 톱니가 반대방향으로 되어 있어서 밀어내면서 나무를 자른다는 사실과 더불어 스푼을 사용하는 데도 미국에서는 밀어내면서 떠올리는데 우리는 앞으로 당기면서 떠먹는다.
이런 차이점을 대비하여 두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4. 의문을 품어보는 착상

왜 예수의 제자는 12명인가에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유대민족의 12지파의 대표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정대표, 부대표를 두었다면 24명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왜 여자는 한 사람도 없을까란 의문을 품어본다면 흥미로운 수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역(逆) 사고의 착상

기존의 개념이나 가치를 정 반대로 생각해보는 착상법이다. 수필의 묘미가 역설에도 있는 만큼 이런 착상법의 훈련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자가용의 편리성 때문에 요즘은 자가용 홍수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자가용의 불편이나 위험에 초점을 맞추면 '무 자가용 상팔자'란 수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 '돈이 많으면 좋다' 라는 황금만능시대의 병폐를 꼬집고 강도나 도둑의 침입에 불안해하는 걱정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하는 '돈 없음의 행복'이란 글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역사고 방식으로 이미 '흥부 격하론'이나 '놀부 변호론'이란 수필이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악처를 위하여 '크산티페 변호론'이 나오기도 했다.


6. 상식을 뒤엎어서 생각해보는 착상

이는 역사고의 착상과 비슷하다 하겠는데 상식 선에서 노상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바라다보면 신선한 착상은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상식을 뒤엎어서 다시 생각해보는 노력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7. 고정관념에서 탈피해보는 착상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새로운 것을 창안해낼 수 없다. 가령 가을에 관한 수필을 쓴다고 하자. 고정관념에 매달리면 '슬픈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결실의 계절' '독서의 계절'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진부해지기 쉽다. 그러나 반대로 '기쁨과 희망의 계절'에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참신한 착상이란 평을 받게 될 것이다.


8. 관점(觀點)을 바꾸어보는 착상

사물을 관찰할 때 정면관찰과 측면. 후면. 수직. 수평. 입체관찰이 있을 수 있듯이 어떤 소재를 택하여 합당한 주제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꾸어서 다각적이고 다양한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한 우물을 계속 깊게만 파는 것이 수직적 사고라면 동시에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것은 수평적 사고라고 하겠다. 그런 방식이 오히려 물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일 수도 있다.

9.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착상

낡거나 낡았다고 생각되는 지식이나 전통사고, 사상, 민속, 풍속 등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분만시 총각의 붉은 머리댕기를 복부에 얹어놓으면 순산한다는 속신을 심리적 무통분만설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해석과도 같은 것이다.

10. 하이브리드(Hybrid)에 의한 착상

이것저것 서로 다른 이질(異質)의 것들을 서로 결합시켜 보는 사고법으로, 발상의 전환을 위해 자기가 생각 하고 있는 것에 전혀 관계가 없거나 인연이 먼 다른 것을 끌어들여 둘러 맞춰보다 떠오르는 새로운 착상을 얻는 방법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재료가 많다고 음식이 맛있는 것도 아니고, 재료가 좋다고 좋은 집이 지어지는 건 아닙니다.
수필이란 음식, 수필이란 집은 필요한 것만으로 맛을 내고, 집을 짓는 것입니다.

한 송이의 꽃을 보고도 보는 사람의 심정에 따라 그 꽃이 슬퍼 보이기도 하고, 기뻐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곧 수필 쓰기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글로 옮겨놓는 것인데 그 생각 만들기를 '착상'이란 말로 쓰고 있습니다. 글쓰기의 첫 번째는 바로 바로 이 착상입니다.

가설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와 현실적으로 비슷한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것과 대비되는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거기에 의문을 품어보기도 하고, 그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비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기도 하고, 생각하는 관점을 바꾸어 보기도 하면 아주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택할 것과 버릴 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수필을 만들어 가는 주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린다고 해도 어떤 사람은 슬픈 사랑을 떠올릴 수 있고, 그냥 아름다운 사랑만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고, 가난한 사랑, 고통스런 사랑 등 사람에 따라 자신이 체험한 사랑에 따라 사랑의 느낌도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 모두를 다 수용할 수는 없을 수 있습니다.
더러는 있어도 빼놓고 넣지 않았을 때 더 맛이 있는 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는 것, 곧 모든 것이 다 수필의 글감이 될 수 있으되, 또 다 수필의 글감이 될 수 없기도 합니다.

아무리 귀한 것도 내 것이 아니면 소용없는 것처럼 수필에서의 '살릴 것만 살리기'는 버릴 것을 버리라는 말인 것입니다.


[참고] 수필가 반숙자의 수필 쓰기

혼(魂)으로 쓰는 글

반숙자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 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

내가 수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인은 나에게 "가슴으로 오는 소리를 듣고, 가슴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어느 분은 "혼(魂)으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삭여 보면,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는 곧 자신의 생명을 피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통이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도하듯 쓰다 보면, 바람은 잔잔해지고 삶의 구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다. 친구이듯 스승이듯 붙잡아 주고 다독여 준 수필, 그래서 엄격하게 이렇게 저렇게 써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다. 이론에 급급하다 보면, 쓰고 싶은 대로 씌어지지 않았다. 나의 글이 잡초처럼 질기고 모양 없음은 거기에 기인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어떻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쓰느냐에 마음을 쓴다. 글감이 진국이면 표현이나 구성에 다소의 무리가 있다 해도 전달되는 공감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모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수없이 흔들리며 글을 쓴다. 그것을 미완(未完)의 허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감성, 체험, 지식, 사유를 동원하여 쓰지만, 써 놓고 보면 미흡하기 짝이 없다. 지금도 마감일에 쫓겨 원고를 부치고 나면 몹시 앓는다. 또 활자화되어 나오는 글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열어 보지 못하고 며칠을 보낸다. 그 때의 부끄러움과 허탈함이 딧 글을 생각하게 하고 쓰게 하는지 모른다. 수필이 개성의 문학이라 하고, 한 작가가 쓰는 작품이 같을 수 없음은 편편마다 느껴지는 대상이 다르고, 표현의 기법도 새로움 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나에게 수필 작법이라는 트여진 도(道)가 없다. 다만, 오래 전부터 몸에 밴 버릇이 몇 가지 있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때마다 글을 쓴다.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게 지나칠 수 없는 대상들 자연과 사람들, 모든 사물들과의 교감을 느낌대로 기록해 둔다. 그런 습관은 잠들지 못하 도록 의식을 깨우고, 사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길러 주는 것 같다. 또 섬광처럼 지나 가는 영감들을 메모한다.

개미가 먹이를 물어 나르듯이 나의 체험을 확대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스크랩한다. 이 노트는 내 글감의 창고다. 그러나 창고의 글감들이 다 그대로 원고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내 것을 소화되고, 그 때의 주제와 접목되었을 때 가능하다.

나는 주제가 붙어서 오는 청탁 원고 쓰기가 어렵다. 기량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고, 독자를 의식하거나 잘 써 보려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 흔들인가. 매번 쓰는 글인데도 절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안개 자욱한 빙벽이고, 어떤 때는 손을 내밀면 잡힐 듯하다가 저만치 물러가고 더 가까이 다가서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 는 피안의 영봉, 시시각각 변하는 사유의 성(城)이다.

절벽 앞에서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린다. 기억을 뒤져 보고 쉽게 상(想)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메모 노트를 펼친다. 어떤 분은 그것을 '예술적 감흥'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계기 또는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계기나 충동에 의해 대상이 잡히면 주제를 향해 소제들을 모으고,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고심한다. 그리고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자문하면서 제목을 잡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공통된 난제가 첫 대목이다. 첫 대목에서 글의 주제를 암시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첫 구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글 쓸 때의 유의점은 나 자신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한다. 작가는 자신만치의 글을 쓴다. 잘 쓰려고 애쓰는 대신, 나의 렌즈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을 담담하게 쓰고자 한다.

감추지 말고 자신의 부족한 면까지 성찰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필은 곧 그 사람 이 된다. 그런 면에서 수필은 나에게 허구를 허락하지 않고, 인격적인 만남을 요구한다. 문장은 소박하고 되도록이면 쉽게 쓰고자 한다. 편견이 아닌 보편적인 진실의 모습을 나의 사유로 걸러 나의 그림으로 형상화하려 한다. 글 쓰는 일을 산고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나는 열병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쓰고자 하는 대상과의 어우러짐, 그것은 밀애와도 흡사한 심적 충동이다. 자나 깨나 오로지 탐구하고 유인하고 애무하고, 의식은 한 층계씩 내면으로 침잠한다. 열이 오른다. 눈빛이 비어 가고 오관의 넋이 빠져 버린 허수아비가 되면서, 눈부신 빛줄기를 따라간다. 그럴 때 나는 수필혼과 접신된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서 가슴을 열어 주면 일사천리로 절벽을 오른다. 그렇게 마무리 짓는 것은 퇴고를 많이 하지 못한다. 아마도 사랑에 눈이 먼 탓일 것이다. 내 안에 고여서 출렁이는 것을 쓸 때의 일이다.

대개의 경우는 노트에 초벌을 쓰고, 원고지에 세 번쯤 옮기면서 가지를 쳐 낸다. 청탁 기일 에 쫓기지 않으면 서랍 속에 묵히면서 퇴고를 한다. 지금까지의 글이 살고 싶다는 외마디 소리였다면, 앞으로의 들국화 같은 수필을 쓰고 싶다.

악천후의 기상에도 쇠하지 않고 무서리 내린 들녘에 다소곳이 피어나는 들국화, 저만의 조용한 품격을 지니고 깊은 사색으로 결을 삭여 내 아름다운 혼이 깃든 글, 유연하게 흐르되 뼈가 있는 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감동의 향기가 있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