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교실(최원현 강의)

제16강]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7 - 쓰는 것이 왜 어려운가 ⑤

방울꽃 2006. 8. 23. 22:27
제16강]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7 - 쓰는 것이 왜 어려운가 ⑤



5. 아까워 말고 버리기/살릴 것만 살리기


1. 아까워 말고 버리기


처음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가장 큰 장벽은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기야 그걸 어떻게 찾아낸 말들이요, 문장인데 아깝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다음의 <비교 글1><비교 글2><비교 글3>은 글 한 편의 내용을 줄여가며 퇴고했던 것입니다.
먼저 <비교 글1>을 보겠습니다.

<비교 글1>

저녁 노을/최원현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그 날의 저녁노을은 실로 충격이었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어디로도 도망 할 수 없을 것 같은 갇힌 나를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였다. 살이 약간 약해지는가 싶더니 서쪽 하늘이 부울겋게 물드는 게 아닌가.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깜짝 놀라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보는 노을, 잃어버렸던 소중한 무언가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홍시 빛, 그랬다. 하늘은 분명 홍시 빛이었다.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훨씬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작년에 내려가지 못했었으니 그간 더 많이 늙으셨을 터였다. 쪼글쪼글해 져 가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은 세월 앞에 속수무책인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요,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었다. 내가 올 길을 수없이 내다보았을 할머니, 도착할 시간을 알려드렸음에도 그 시간과는 상관없이 날이 밝으면서부터 온종일 내가 나타날 곳을 마냥 내다보셨을 터였다.

그런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할머니의 반가움이 어떠셨겠는가.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였다.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셨다. 허옇게 뭐가 많이 묻어있었다. 찬찬히 보니 감이었다.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토양 때문인지 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누가 이 큰 감을 갖다드린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겨울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것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그런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장도감을 내가 못 먹게 된 것이 안타까워하며 뚜껑을 열어보고 다시 넣어놓길 수 차례, 결국은 먹지 못하게 되고 말았지만 그것마저도 버릴 수 없으셨다. 보여라도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다음 해가 되어서야 내려간 내게 할머니는 그 감을 내오신 것이다.
참으로 큰 감이었다. 그렇게 큰 감을 나도 처음 보았다. 하지만 하얗게 백태가 끼었고, 묵은 쌀독에서 생긴 쌀벌레 때문에 덩어리가 된 쌀이 감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없는데 내가 할머니께 해 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감은 아주 식초가 되어 시큼한 냄새를 풍겨 냈다. 그러나 그 냄새마저도 할머니의 사랑 냄새라 여겨지니 아리아리 가슴에 싸아한 전율로 전해져 왔다. 얼마나 더 사실까. 내가 무언가를 해 드릴 수 있을 때 까진 사셔야 할텐데 안타까움과 불안이 가슴 가득 몰려왔다.

떠나오는 날,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중학교 때까지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차 시간으론 좀 빠르긴 하지만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나서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말씀을 따른 것이다.
노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물든 하늘은 핏빛 강이었다. 아니 할머니가 나를 위해 남겨두었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손으로 건드리면 이내 분홍빛 진액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엄청나게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마루에 올려져 있는 것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빨리 가라고 재촉하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신설포 나루를 향해 걸음을 빨리 하자 그 때까지 머물러있던 해가 순식간에 산을 넘고 만다. 이내 하늘은 더욱 짙은 홍시 빛이 되더니 사방엔 어둠이 조금씩 몰려든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마치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의 모습 같아 왔던 길을 돌아본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 고개 마루에 올라섰다. 저만치 아스라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직도 서 계신다. 목청껏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보지만 목소리마저 어느새 울음이 되어 잦아들고 만다. 이내 가야 할 길로 달려간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기차역을 향했었다.

오늘 그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다.
그러나 할머니는 가시고 아니 계신다. 십 수년 전에 이미 지는 해처럼 가버리셨다. 그러고 보니 미처 못 느끼고 있었지만 어느덧 나 또한 저녁 노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어찌 생각하면 인생의 황혼 또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닐까.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돌아보지 말고!' 그런데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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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1,800자의 글입니다.
짧게 써야 한다는 부담이 가급적 군더더기 말을 빼버렸기에 문장이 짧고 무뚝뚝한 감마저 없지 않습니다. 먼저 제목을 <저녁노을>로 했는데 저녁노을! 하면 무엇이 연상됩니까?

글의 구성을 보겠습니다.
(1)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가 홍시빛 저녁노을을 보게 되었습니다.
(2) 노을을 보자 까맣게 잊고 있던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3)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을 맞아 외할머니 댁에 내려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외손자에게 주려고 남겨 두었던 1년도 넘게 지난 장도감.
못 먹게 되어버린 감을 보여라도 주겠다고 보관해 두신 외할머니의 사랑.
(4) 시어 못 먹게 되어버린 감을 보며 할머니의 사랑을 가슴 가득 안는다.
(5)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오는데 서산마루에 걸려있던 저녁 해가 넘어가는 모습에서
할머니도 그렇게 한 순간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안타까움과 불안을 가슴에 담는다.
(6)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십수년이 지난 날, 옥상에서 그 홍시빛 노을을 보며 다시 할머니를 회상한다.
(7) 그리고 할머니의 회상 속에 나도 머잖아 그렇게 떠나갈 것이 자연의 순리임을 깨닫는다.

저녁노을은 인생을 연상하게 합니다.
저녁노을 발견 - 노을을 보자 할머니에 대한 옛 추억 살아남 - 추억의 내용 - 자연의 순리(생노병사)
- 그 순리속의 나 발견 등 인생도 노을과 같다고 보고 쓴 글인데 상당히 많은 말을 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1,800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대폭 줄여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는데 무엇을 버릴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내용을 다시 보며 문단을 빼버려도 전체 내용이 영향을 크게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게 어떤 것인가를 진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수정해 본 글이 <비교 글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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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글2>

저녁 노을/최원현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그 날의 저녁 노을은 실로 충격이었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어디로도 도망 할 수 없을 것 같은 갇힌 나, 그런데 햇살이 약간 약해지는가 싶더니 서쪽 하늘이 부울겋게 물드는 게 아닌가.
저녁노을이었다. 순간 콘크리트 숲 속에서 잃어버렸던 소중한 무언가를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홍시 빛, 그래 하늘은 분명 홍시 빛이었다.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훨씬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작년에 내려가지 못했었으니 그간 더 많이 늙으셨을 터였다. 쪼글쪼글해 져 가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은 세월 앞에 속수무책인 나로서는 안타까움이요,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었다. 도착할 시간을 알려드렸음에도 날이 밝으면서부터 온종일 내가 나타날 곳을 수없이 내다보셨을 터였다.

그런 할머니 댁에 도착하여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였다.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셨다.
허옇게 뭐가 많이 묻어있었다. 찬찬히 보니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려운데 누군가 갖다드린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겨울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것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헌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장도감을 내가 못 먹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곯아버려 먹지 못하게까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버릴 수는 없으셨다. 보여라도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다음 해가 되어서야 내려간 내게 그 감을 내오신 것이다. 참으로 큰 감이었다. 하지만 하얗게 백태가 끼고, 쌀벌레로 덩어리가 된 쌀까지 묻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해 드린 게 아무 것도 없는데.
감에선 독한 식초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 냄새마저도 할머니의 사랑으로 여겨져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이 일었다. 얼마나 더 사실까. 내가 무언가를 해 드릴 수 있을 때까진 사셔야 할 텐데 안타까움과 불안이 가슴 가득 몰려왔다.
떠나오는 날,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가 나를 위해 남겨두었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엄청나게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마루에 걸려있는 것이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신설포 나루를 향하자 머물러있던 해도 순식간에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왔던 길을 돌아본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 고개 마루에 올라섰다. 아스라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직도 서 계신다. 목청껏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보지만 목소리마저 어느새 울음이 되어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었다.

오늘 그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다. 그러나 할머니는 가고 아니 계신다. 십 수 년 전에 이미 지는 해처럼 가버리셨다. 그러고 보니 미처 못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 나 또한 저녁노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의 황혼 또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닐까. 할머니가 받아들인 순리를 이제 내가 받아들일 차례인 것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돌아보지 말고!' 그런데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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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글1>과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나 400자 정도가 줄여졌습니다. 빼내기 위해 다른 부분에 오히려 더 보강을 해야 되는 것도 있고,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부분은 빼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500자 정도를 더 줄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더 작업을 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퇴고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교 글3>입니다.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교 글3>

저녁 노을/최원현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저녁노을은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분명 홍시 빛이었다.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신다.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려운데 누군가 갖다드린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것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헌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은 것이 안타까워하시다가 보여라도 주겠다며 다음 해 내가 내려갔을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묻어 있고, 역겨운 신 냄새까지 났다. 그러나 그런 냄새까지도 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니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로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마루에 걸려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댔지만 목소리는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그 날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인 순리를 이제 내가 받아들일 차례가 된 것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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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없어도 될 말들을 빼버리면 글이 아주 깔끔해 집니다.
그러나 너무 줄이고 나면 글이 건조해 지고, 의미 전달이 더 안 될 수 있습니다.
<비교 글3>도 그런 감이 들 것입니다.
원고량 때문에 양을 줄이다 보면 독자에게 전달되는 감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교 글2>가 더 정감이 갈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너무 쓸 것이 없다는 것과 너무 많이
써지는 것입니다.
너무 쓸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생각하는 범위, 보는 각도, 뒤집어 생각하기, 독자의 입장이
되어보기 등으로 쓸거리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무언가 더 쓸 게 나오기 마련입니다.
또한 쓸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 될 때는 내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 버리고 하나만 남긴다면 그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나 더 남긴다면 무엇인가 등으로 중요도를 스스로 체크해 가며 버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버린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알아야 좋은 글도 쓸 수 있습니다.
즉 버릴 것을 가려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귀한 것이 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모래더미 속에서 사금을 골라내는 눈과 귀, 그것은 마음을 비울 때 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비교3>으로 퇴고를 했는데 마음이 개운치가 않습니다.
너무 깡마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움 같은, 그리고 글의 맛과 멋이 별로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해서 다시 조금 손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비교4>입니다.

<비교4>

저녁 노을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저녁 노을은 참으로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놀라움이기도 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홍시 빛, 그래 분명 홍시 빛이었다. 헌데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번쩍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는데, 저녁상을 물리고 나니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셨다. 그런데 갑자기 신내가 코를 찌른다.
제 색깔도 잃어버린 것 같은 물건,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정말 대단히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만한 큰 감을 딸 수가 없을 텐데 누군가 귀한 것이라며 갖다드렸던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큰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모양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하필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게 된 것을 마냥 안타까워하시다가 그걸 보여라도 줘야겠다며 다음 해 내가 내려갈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덕지덕지 묻은 채 역겨운 신 냄새를 풍기는, 먹을 수 없게 된 감, 그러나 손자에게 주고자 하셨던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와서인지 오히려 지금까지 내가 먹어봤던 어떤 감 맛보다도 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역겨운 신내까지도 할머니의 사랑 맛이 되어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처럼 전해져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어머니의 사랑보다 할머니의 사랑으로 자라온 나, 나를 향한 그런 할머니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 것이며,또 얼마나 클 것인가.

떠나오던 날, 할머니를 뒤로하고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저만치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져 분홍빛 진액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마루에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자 노을을 길게 깔아놓은 채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봤더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들릴 리도 없겠지만 목소리마저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을 되풀이하며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구 뛰었었다.

그런데 30년 전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이제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이시던 순리를 벌써부터 내가 받아들이고 있었음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저녁 노을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삶,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따라온다.

가는 것, 그래 삶은 가는 거다. 그러나 어디로 얼마큼이나 더 갈 수 있을까. 그 날 보았던 할머니의 노을은 스무 해나 더 걸려 있었다. 내 노을은 또 얼마나 더 걸려 있을 것인가. 그래, 삶은 인생의 노을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일 게다. 해서 할머닌 어서 가라고 하셨나 보다.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더 서두르라는 것인가 보다.
아파트 단지 앞 나무 위에서 때늦은 매미 한 마리가 섧히섧히 울고 있다. 생의 노을은 저런 미물에게도 어김없이 오고 말 것 아닌가. 시간을 아끼라는 것, 할머니의 노을이 이미 내 노을이 되어 있는 지금,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내 생의 노을을 보고 있었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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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금 더 길어졌다고 해서 그 모자람이 다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만큼 버릴 때 버리고, 취할 때 취하는 것, 거기에 수필 쓰기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수필 쓰기에서도 타석에 들어서는 야구 선수와 같이 마음을 비우고 들어오는 공을 끝까지 볼 때 안타 내지 홈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타석에 서있는 것입니다. 지금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가려내는 선구안 그것이 바로 수필을 쓰는 눈이요, 마음입니다.